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카이사르의 내전 (문단 편집) === 폼페이우스의 탈출 === 카이사르가 남하하면서 근방의 도시들이 전부 카이사르에 붙는 선택을 하자 폼페이우스는 이탈리아를 버리기로 결심한다. 이탈리아 도시들이 원로원의 훈령을 무시하고 카이사르에게 잇달아 붙은 이유는 불과 한세대 전에 있었던 [[동맹시 전쟁]]의 여파가 남아서 그리한 것으로 보인다. 40여 년 전까지 이탈리아의 도시들은 로마의 동맹시 취급을 받아왔고 따라서 로마 시민권이 아닌 라틴 시민권을 소유한 동맹시 시민들은 참정권이 없었다. 이러한 제도는 로마의 지배가 수백 년이 계속되어 이탈리아 도시들이 로마와 거의 완벽히 동화되었음에도 유지되었다. 마침내 이탈리아의 도시민들이 이러한 불평등을 없애달라고 요구하기 시작하였고 이에 적극적으로 호응한 로마 정치가들이 바로 민중파 인사들이었다. 그러나 이 민중파 정치가들이 연이어 살해당하는 일이 생기자 마침내 이탈리아 도시들이 로마에 반기를 들어 동맹시 전쟁이 발발하였고 로마 원로원은 마지 못해 이들을 로마 시민으로 격상해 주기로 하였다. 하지만 원로원 측에서 그런 결정을 내려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전쟁은 상당히 치열하게 전개되었고 로마가 마침내 이들 [[반란군]]을 군사적으로 분쇄하면서 막을 내리게 되었다. 이 전쟁 이후로도 이들 동맹시 시민들에게 어떻게 참정권을 부여할 것인가가 주요 정쟁이 되었는데 원로원 측에서는 이들 라틴 도시들에게 선거구 4개를 주고자 하였다. 선거구는 30여 개에 달하였는데 이들에게 4개 정도를 주는 것은 이 동맹시 시민들을 차별하는 것이었으므로 민중파 정치가들은 이에 이의를 제기하였다. 마침내 이 선거구 문제로 인해 내전이 발발하였고 민중파 인사였던 킨나와 [[가이우스 마리우스|마리우스]]가 로마를 점령한 뒤 반대파 원로원 의원들을 살해하였고 몇 년 뒤 원로원파 인사였던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술라]]가 로마를 점령한 뒤 민중파 정치가들을 집단 처형하면서 로마 정치는 피로 얼룩지게 된다. 그 뒤 술라가 물러난 후 술라측 인사들이 원로원을 계속 장악한 상태가 유지되었고 동맹시 도시들은 계속 차별대우를 받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유일하게 남은 민중파 인사인 카이사르가 남하하자 이탈리아 도시들은 전부 술라쪽 출신의 로마 원로원보다는 그를 지지하는 태도를 보인 것이었다. 게다가 카이사르는 막 갈리아 제패라는 군사적 업적을 남긴 상황이었으므로 그에 대한 지지도 상당히 높았다. 이러한 이탈리아 도시들의 연이은 이탈은 로마 원로원 측의 예상을 뛰어넘는 일이었다. 초기 원로원측은 카이사르가 남하하였을 때 이탈리아에서 군사적으로 맞설 움직임을 보였다. 원로원은 로마 인근에서 징집을 시행하였으며 폼페이우스는 카이사르에게서 거둬들인 2개 군단을 카푸아에 머물게 하면서 북상할 생각을 하였다. 하지만 카이사르가 막상 루비콘 강을 건너 남하를 개시하자 이탈리아 도시들은 카이사르의 군대가 접근하는 것만으로 카이사르에게 붙어버리고 이탈리아 도시들에게서 징집한 로마 군단병들[* 로마 군단병은 로마 시민으로만 구성되어야 했다. 따라서 동맹시 전쟁 이전엔 로마 군단병은 오직 로마시에서만 징집할 수 있었다. 하지만 동맹시 전쟁 이후로 이탈리아 도시들이 로마 시민권을 갖게 되자 로마는 지역 도시들에게서도 로마 군단병을 뽑을 수 있었다.]은 원로원 의원인 지휘관을 버리고 탈영하거나 카이사르에게 가담했다. 이런 상황이 계속되자 원로원 의원들은 이탈리아에서 카이사르와 맞설 의지를 잃어버리고 폼페이우스 역시 이탈리아를 버리고 떠나기로 결심한 것이었다. 폼페이우스는 이탈리아의 발부리 끝에 있던 항구인 브룬디시움(브린디시)으로 이동하였다. 각 법무관들과 전직 집정관 등이 군대를 이끌고 속속 폼페이우스에게 합류하였고 집정관들은 이탈리아를 떠나 [[그리스]]에서 군대를 편성하는 업무를 맡기 위해 디라키움(두러스)으로 떠났다. 폼페이우스가 브룬디시움에 남아있다는 소식을 들은 카이사르는 불어난 휘하의 6개 군단을 이끌고 그를 추격하기 위해 떠났다. 카이사르는 이 상황에서도 폼페이우스와 교섭을 시도한다. 그는 생포된 폼페이우스의 측근을 폼페이우스에게 보내 자신이 브룬디시움에 도착한다면 회담을 하자고 제안한다. 그러나 폼페이우스는 집정관들이 브룬디시움에서 그리스로 떠나 없으니 회담이 어렵다고 답신을 보낸다. 이에 카이사르는 대화로 해결하기를 단념하고 곧 항구 봉쇄에 들어간다. 카이사르는 자신의 군단병을 동원하여 항구에 커다란 [[제방]]을 쌓아 둘러싸고자 하였다. 그리고 수심이 깊은 곳은 [[뗏목]]을 동원해 [[바리케이드]]를 치려고 하였다. 이에 대항하여 폼페이우스는 커다란 상선을 무장시켜 공사중인 병사들을 공격하였다. 이들은 매일같이 전투를 벌인다. 그러면서 9일이 지난 뒤 디라키움에 집정관들과 군단을 운반하였던 대규모 [[수송선]]들이 임무를 마치고 귀한한다. 카이사르는 공사를 절반쯤 마쳤을 때라 이들의 입항을 저지하지 못했고 폼페이우스는 이 배들에 병력을 싣고 곧장 그리스로 떠나고자 하였다. 폼페이우스는 우선 브룬디시움 성벽 곳곳에 병사들을 배치하여 카이사르의 공격에 대비한 뒤, 병력이 승선하자 바로 신호를 보내 이들 수비병들을 범선으로 불러들였다. 신호가 떨어지자 수비대는 지체없이 [[범선]]으로 달려갔고 이들이 승선하자 수송선은 그리스로 향해 출발하였다. 카이사르는 전속력으로 달려가 항해하다 충돌하여 전복한 배 두척을 나포하였으나 폼페이우스는 대부분의 병력과 함께 이탈리아를 떠나는 데 성공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